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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저와 전쟁

by warnpeace 2024. 10. 16.

‘전쟁과 인물’ 두 번째 편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남긴 율리우스 시저(Julius Caesar)가 어떻게 전쟁을 일으켰는지에 대해 알아봅니다.


1. 시저와 전쟁

율리우스 시저(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 공화국 말기의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였으며, 그의 전쟁은 로마의 확장이라는 명분하에 주로 개인적 야망, 정치적 필요가 얽혀 있는 복잡한 배경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는 전쟁을 통해 권력을 추구했고, 이는 결국 로마 공화국몰락과 제정 시대의 시작을 예고하게 됩니다. 여기 그의 상장 과정과 당시 상황 등을 통해 시저가 전쟁을 일으키게 된 주요 배경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1 가족 배경과 성장 과정

1) 어린 시절

시저는 기원전 100년경에 로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은 '율리우스 씨족(Gens Julia)'으로, 로마의 오랜 전통 있는 귀족 집안이었으나, 왕정 폐지 이후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으로 이행되는 시기여서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아프로디테의 아들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가문을 신성시했지만, 실제로는 몰락한 귀족 가문으로 경제적으로도 풍족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사회적, 정치적 갈등과 내부 권력 투쟁으로 내전이 끊이지 않는 로마 사회의 격동기를 겪었습니다.

2) 가족 배경

그의 고모부인 군사 지도자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그의 정치적 적수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사이의 내전을 목격하면서 성장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귀족파와 민중파라는 두 정치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전통적인 기존 권력 구조를 유지하고자 했던 귀족파(옵티마테스)와 평민과 중하층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며 귀족파의 특권을 약화시키고, 평민 회의(Concilium Plebis)나 호민관(Tribune of the Plebs) 같은 대중 정치 기구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민중파(포풀라레스)가 그것이었습니다. 마리우스는 평민 출신으로 로마 군사 체제에 큰 변화를 일으켰고, 술라는 귀족 계급을 대변하면서 반대파를 억압했습니다. 술라는 기원전 88년에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위해 동방으로 출정하려 했으나, 마리우스가 이를 방해하고 지휘권을 빼앗으려 하면서 갈등이 격화되었습니다. 이후 술라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돌아와 쿠테타로 권력을 장악하고, 귀족파에 반대하는 인물들을 처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프로스크립션(proscription)' 이라는 공개 지명 수배 및 재산 몰수 제도를 도입해, 반대파 인사들을 제거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당시 시저는 고모부 마리우스의 민중파와 연관이 되어 처형당할 위기에 있었으나, 당시 존경의 대상이던 신전의 여성 신관들의 ‘율리우스 가문의 대가 끊긴다’는 청원과 집정관 출신인 외할아버지의 후광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저는 안전을 확신못해 한동안 로마를 떠나야 했습니다. 이는 시저에게 정치적 야망과 군사적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 정치적 경력의 시작

시저는 젊은 시절부터 권력과 명성을 얻기 위한 강한 출세욕에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전략적으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는 키케로와 같은 저명한 인물들과 교류하며 정치적 지식을 쌓았고, 군사적 경험을 얻기 위해 다양한 전쟁에 참가했습니다. 기원전 69년, 그는 히스파니아(스페인)로 파견되어 군사적 성과를 쌓고 돌아왔으며, 기원전 63년에는 최고종교관(Pontifex Maximus)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러한 직책은 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나아가 대중의 지지를 얻어 정치적 명성을 쌓기 위해 주로 포퓰리스트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 나갔습니다.

4) 정치적 성장

시저가 활동하던 시기 로마 공화국은 내부적으로 심각한 정치적 불안과 분열을 겪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입장보다는 원로원(Senate)의 권위를 옹호하고, 그에 기반한 정치 운영을 지지하는 원로원파, 이 원로원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한 귀족파민중파 간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공화국은 혼란에 빠졌고, 시저는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했습니다. 기원전 63년에 최고종교관(Pontifex Maximus)이 된 이후 기원전 60년에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를 결성했습니다. 이 연합은 각자의 정치적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들의 지원을 통해 집정관(Consul)으로 선출되며 본격적으로 로마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일단 삼두정치로 권력을 분담했지만 점차 폼페이우스와의 갈등이 심화되어, 그는 군사적 성공을 통해 로마 내에서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여 더 큰 권력을 얻고자 했습니다. 또한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사적 승리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결국 갈리아(지금의 프랑스와 그 인근 지역)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1.2 정치적 야심

1) 갈리아 전쟁과 전략적 성공

시저는 집정관 임기를 마친 후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던 갈리아의 일부 지역인 갈리아 키살피나(Gallia Cisalpina, 알프스 남쪽으로 현재 이탈리아 북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Gallia Narbonensis, 지중해 연안으로 현재 프랑스 남부)등의 총으로  파견되어 군사적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갈리아의 나머지 지역은 여러 독립된 부족들로 나뉘어 있었고, 시저는 이 부족들마저 정복하여 갈리아 전체를 점령하겠다는 명분으로 기원전 58년에 전쟁을 일으켜, 50년까지 갈리아 대부분을 정복했으며, 그 과정에서 군사적 명성과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는 얻은 부를 로마 시민들에게 분배하는 등 민중의 지지를 강화했고, 이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습니다.
갈리아 전쟁은 단순히 로마의 국익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시저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군사적 성공을 통해 그는 로마에서 정치적 지지 기반을 확장했으며, 병사들로부터의 충성을 확보했습니다. 군대와의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게 되어 로마 내 정치적 경쟁자들, 특히 폼페이우스와의 권력 투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또한, 시저는 갈리아 전쟁 기록을 『갈리아 전쟁기』라는 저서로 남겨 대중에게 자신의 업적을 과시했고, 이는 그의 정치적 인기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와의 정치적 갈등이 극에 달하자, 결국 기원전 49년에 루비콘 강을 건너며 내전을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로마 공화국의 내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만든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2) 루비콘 강 사건과 권력 장악

시저는 자신의 군사적 성공과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권력 장악을 시도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삼두정치가 와해되었고, 시저와 폼페이우스 사이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지지를 받으며 시저의 권력을 견제하려 했고, 시저는 자신의 군대와 갈리아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 했습니다. 기원전 49년, 원로원은 시저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민간인 신분으로 강을 건너 로마로 돌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시저는 이를 거부하고 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내전을 시작했습니다. 무장한 채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은 반역 행위로 로마 공화국의 법을 어기는 행위였으나, 시저는 이를 통해 로마 내에서의 완전한 군사적 통제권을 장악하려 했습니다. 그의 결정은 로마 공화국몰락과 제정 로마의 성립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역사적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1.3 독재관 지위와 죽음

내전은 결국 시저의 승리로 끝났고, 그는 기원전 45년에 종신 독재관(Dictator Perpetuo)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권력 집중은 원로원과 귀족들의 반감을 샀고, 결국 기원전 44년,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 암살당하게 됩니다.


2. 결론

시저의 전쟁은 그의 개인적 야망, 정치적 필요성, 그리고 사회적 갈등이 결합된 결과였습니다. 그의 군사적 업적은 로마의 영토 확장에 기여했으나, 결국 로마 공화국의 몰락과 제정시작을 촉진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은 로마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율리우스 시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