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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과 전쟁

by warnpeace 2024. 10. 18.

‘전쟁과 인물’ 네 번째 편으로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어떻게 전쟁을 일으켰는지에 대해 알아봅니다.


1. 나폴레옹과 전쟁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는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 지도자로, 전쟁을 통해 유럽을 정복하려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목표는 기존의 유럽 질서를 타파하고, 프랑스 주도하에 유럽을 재편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나폴레옹의 전쟁은 프랑스와 프랑스외 유럽 여러 강대국들(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 등) 연합간의 대립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성장 과정과 당시 상황 등을 통해 나폴레옹이 전쟁을 일으키게된 주요 배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1 어린 시절

1) 가족 배경

나폴레옹은 1769년 프랑스 지배하에 있던 코르시카 섬 아작시오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탈리아계 귀족 가문 출신이었지만, 그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버지, 카를로 보나파르트는 코르시카의 작은 귀족이었으며, 변호사이자 코르시카의 지역 정치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프랑스에 협력하여 가족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 하였습니다. 어머니 레티치아 라몰리노는 가정적이었지만 강인한 성격에 엄격한 교육 방침을 가진 인물로 나폴레옹의 어린 시절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코르시카는 프랑스에 합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역으로, 나폴레옹은 프랑스와 코르시카 사이의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성장했습니다.

2) 교육
나폴레옹은 코르시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언어적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의 모국어는 이탈리아어의 방언이었고, 프랑스어는 유창하지 않았습니다.
1779년, 불과 10세의 나이로 프랑스 본토로 건너가 브리엔느에 있는 군사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코르시카의 문화와는 다른 환경에서의 적응을 필요로 했고, 나폴레옹은 프랑스어를 더 배워야 했습니다. 이러한 언어 장벽은 학교 생활 동안 종종 프랑스 본토 출신 학생들로부터 차별을 받아 어린 나폴레옹으로서는 외로움과 고립감을 느끼게도했지만, 이는 나중에 오히려 더 독립적이고 큰 야망과 의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 1784년, 그는 파리의 에콜 밀리테르(École Militaire)에 입학해 포병 장교 과정을 이수하고, 16세의 나이로 포병 소위로 임관하였습니다. 당시 장교로서 매우 젊은 나이였으며, 군사학교를 졸업할 때 그의 성적은 뛰어나지는 않았으나, 포병 분야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1.2 군사 경력과 출세

1) 프랑스 혁명

20세때인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나폴레옹은 혁명군 측에 가담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나폴레옹의 인생에서 큰 기회였습니다. 혁명 이전에는 귀족 중심의 신분제 사회로 하급 귀족 출신은 고위 군인으로 성장할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또한 혁명은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정치 혼란을 틈탄 외세와의 전쟁을 불러일으켰으며, 반면에 혁명 정부는 일관된 지도자없이 권력 구조가 여러번 바뀌는 불안정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는 군사적 인재에게 커다란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혁명으로 인해 급증한 군사적 수요에 맞춰 빠르게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2) 툴롱 전투(1793)

나폴레옹의 군사적 재능이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낸 사건은 툴롱 전투였습니다. 그는 포병 지휘관으로서 영국 해군의 지원을 받은 왕당파 반군이 점령한 남부 항구 도시 툴롱에서  왕당파와 영국군을 상대로 틀롱을 탈환하는 중요한 승리를 거두면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이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혁명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아 나폴레옹은 대위에서 준장으로 승진해 24세의 나이로 장군에 임명되었습니다.

3) 이탈리아 원정(1796-1797)

1796년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전역의 군사 원정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오스트리아 군대를 상대로 연이은 승리를 거두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는 그의 군사적 명성을 높이고 군사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프랑스 국민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중요한 전환점이되었습니다.


1.3 결혼

1796년, 나폴레옹은 조제핀 보아르네(Joséphine de Beauharnais)와 결혼했습니다. 조제핀은 사교계의 인물로, 나폴레옹의 사회적 지위 상승에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이 결혼은 개인적으로는 불행했고, 결국 후계자를 얻기 위해 1809년 이혼하게 됩니다. 이후, 1810년에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즈(Marie Louise)와 재혼하여 아들 나폴레옹 2세를 두게 됩니다.


1.4 정치적 야심

1) 이집트 원정과 귀국

나폴레옹은 1798년에 프랑스의 영광을 높이고 영국의 해외 무역을 교란시키기 위해 이집트 원정을 강행했지만,이 원정은 군사적 측면에서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영국 해군의 넬슨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나일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크게 격파하면서 이집트에서의 상황은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집트에서 과학적 탐사를 주도하고 프랑스의 문화적 위상을 높인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이집트에서의 군사적 상황이 어려워지자, 나폴레옹은 프랑스 본국의 정치 상황에 주목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경제적 어려움과 외교적 위기로 인해 불안정했고, 총재 정부(프랑스 혁명 정부)는 실질적인 지도력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이같은 프랑스의 정치적 혼란을 인지한 나폴레옹은 이를 권력을 장악할 기회로 판단하고, 1799년 8월 비밀리에 프랑스로 귀국했습니다.

2) 쿠데타 (1799)

1799년 11월 9일,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 정부를 전복하고, 새로운 헌법을 수립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제1통령(집정관)으로 취임하며 사실상 프랑스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정치적, 행정적 개혁을 통해 지지 기반을 강화했습니다
따라서 나폴레옹의 귀국은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는 명확한 정치적 목적이 있었으며, 이집트 원정에서의 상황 악화와 프랑스의 혼란을 기회로 활용한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3)집정관 권력 강화 (1800-1804)

나폴레옹은 집정관으로서 내치와 외교, 군사 정책을 주도하며 권력을 강화했습니다. 1800년 마렌고 전투에서의 승리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고, 1801년에는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콩코르다(Concordat)'를 체결하여 종교적 지지를 얻었습니다. 또한,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하여 법률 체계를 정비하고, 행정 체제를 개혁해 중앙집권화를 추진했습니다.

4)황제 즉위 (1804)

나폴레옹은 권력 기반을 확고히 한 후, 군사적 지지와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국민투표를 통해 황제로 즉위할 것을 확정했고, 1804년 12월 2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은 상징적인 사건으로, 그는 교황 비오 7세가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왕관을 머리에 얹어 자신의 권력과 독립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를 통해 나폴레옹은 프랑스 제1제정을 공식적으로 출범시키며, 유럽의 새로운 강력한 통치자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후 나폴레옹은 프랑스와 유럽 전역에 걸쳐 군사적 확장 정책을 펼치며 유럽 대륙의 질서를 프랑스 주도하에 재편하고자 했습니다.


1.5  끊임없는 전쟁

나폴레옹 전쟁은 대략 1803년부터 1815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주요 전쟁과 전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제3차 대프랑스 동맹(1805)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상대로 한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승리하여 나폴레옹의 전성기를 열었습니다.

2) 제4차 대프랑스 동맹(1806-1807)
프로이센과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하며 유럽 대륙의 패권을 강화했습니다.

3) 스페인 전쟁(1808-1814)
나폴레옹의 동생을 스페인 으로 앉히려는 시도는 게릴라 전투와 반란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6 전쟁 패배와 몰락

1) 러시아원정(1812)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과 보급 문제로 인해 프랑스군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이 패배는 유럽 각국의 반나폴레옹 연합이 결성되는 계기가 되어 나폴레옹의 몰락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2) 라이프치히 전투(해방 전쟁, 1813)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상대로 연합한 유럽군이 파리를 함락시키며 승리하였고, 연합군은 그를 엘바 섬으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3) 백일천하(1815)

1815년 3월, 나폴레옹은 엘바 섬에서 탈출해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100일 동안 재집권했습니다. 이 기간은 ‘백일천하’로 불리며, 나폴레옹은 다시 황제로서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해 6월,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과 프로이센 연합군에게 패배하면서 최종적으로 몰락하게 됩니다.

4)재유배와 사망 (1815-1821)

워털루 전투 패배 후 나폴레옹은 다시 퇴위했으며, 이번에는 더 멀리 떨어진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또 유배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나폴레옹은 6년을 철저히 감시받는 가운데 외로운 생활을 하며, 1821년 5월 5일에 사망했습니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황제 즉위 후 일정 기간 동안 권력을 누렸지만, 러시아 원정 실패와 유럽 연합국의 반격으로 인해 권력이 약화되었고, 결국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2. 결론

나폴레옹은 군사적·정치적 지도자로 칭송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권력과 전쟁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역사적 인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 정신을 확대·변형해 구체제(Ancien Régime)의 봉건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혁명적 이념에 기초한 행정·사법·교육 개혁을 추진해 근대 국가의 기초 틀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혁명 후의 공화정에서 독재적인 권력으로 돌아섰으며, 자신을 황제로 즉위함으로써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펼쳤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언론을 통제하며, 반대파를 탄압했습니다. 그의 독재적 통치는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위배된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또한 자신의 권력과 제국을 확대하기 위해 끊임없는 전쟁을 벌였고, 이는 유럽에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초래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으며, 많은 지역이 경제적, 사회적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의 전쟁 야망은 다른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고 식민주의적 성격을 띠기도 했습니다.